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다마 요시오 (문단 편집) === 극우 [[정치깡패]] === 원래는 공산주의를 공부한 적도 잠깐 있다고 하지만 곧 [[도야마 미츠루]][* 일명 두산만(頭山 満). [[아시아주의]]의 대표격인 인물이고, 일본 국가주의자의 상징중 하나이다. [[을미사변]]의 배후이자 [[경술국치]]의 뒤에서 활약한 것으로 손꼽히는 [[겐요샤]]의 창시자이고,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이나 [[손문]]을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흑룡회]]라고 해서 일본 우익 야쿠자 조직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시아주의]] 항목에서는 이 사람을 [[이상주의자]]로 이론도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을 뿐이라고 언급하고 [[대동아공영권]] 이론에 휘말리면서 이론이 변질되었다는 식으로 적혀 있는데, '''이 사람도 극우파이고 일본중심 병합을 선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흑룡회]]와 건국회이다. 그나마 유사한 정치인이라면 [[이토 히로부미]].][* 야인시대에서 유명해진 하야시([[선우영빈]])도 도야마가 발탁한 인물이다.]밑에서 배우면서 [[국가주의]]([[반공주의]])[* [[천황제 파시즘|쇼와 국가주의]].]를 습득했다. 이후 도야마 미츠루가 고문으로 참여한 [[건국회]][* 도야마를 고문으로 밀어낸 회장이 누구냐면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이다. 이 사람은 '''천황은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학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로운 학풍으로 등장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갖추고 있으며, 법인으로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가지고, 텐노는 그 최고 기관이다'라는 '''상식적인 천황 기관설을 아작내버린다'''. 당시 일본이 실제로는 수상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면서도 명목적으로는 [[신정정치|신권정치]]가 된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 먹혔기 때문이다.]에 가담하여 실업자와 농촌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며 '쇼와 천황 직소사건'을 일으켜서 처음으로 투옥된다. 반년간의 투옥 생활 이후에는 더더욱 급진파가 되어서 이번이는 건국회도 탈퇴하고 이번에는 더더욱 급진화 되어서 [[사사카와 료이치]]가 주도한 [[국수대중당]]에 가입했다.[* 역시 A급 전범이고, [[기시 노부스케]]와 친분이 있었다. [[경정(스포츠)|경정 사업]]으로 번 돈을 갖고 '일본선박진흥회'란 비영리 재단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일본재단'이다.] 국회에서 [[삐라]]를 뿌리고, [[이노우에 쥰노스케]][* 당시 내각이었던 제 2차 와카즈키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자면 [[재정경제부]] 장관 격. 참고로 이 사람은 1932년 우익들에게 대로에서 암살당했다. 이를 [[혈맹단 사건]]이라 하며 이노우에 쥰노스케가 암살당한 다음날에는 [[미쓰이 그룹|미쓰이 재벌]]의 총수였던 단 다쿠마도 암살당한다.] 협박사건을 일으켜서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한 뒤에는 도야마 미츠루의 아들과 함께 당시 수상과 장관을 암살하고 [[황도파]] 군인들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투옥됐다. 그후 외무성 정보부장이던 [[카와이 타츠오]](河相 達夫)[* 후일 호주 공사, 정보국 총재겸 외무차관 등을 역임했다.]에게 발탁되어[* 때문에 코다마는 카와이를 은사, 아버지같은 존재로 여겼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전부터 외무성 정보부의 인맥을 통해서 [[일본제국 해군]]의 후원하에 정보기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와 인맥,기술을 쌓아갔다. 상하이에서 [[텅스텐]]이나 [[라듐]], [[코발트]] 등의 전략물자를 구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텅스텐 구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헤로인]]을 수출했다'''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패전무렵 이렇게 번 돈을 들고 당시 해군상이던 [[요나이 미쓰마사]]에게 찾아갔더니 요나이는 현금만 받고 현물[* 다이아몬드, 금괴 등 이었다고 한다.]은 고다마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돈의 일부는 [[일본민주당(1954년)|일본민주당]][*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당. 1955년 역시 같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합당해서 지금의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이 되었는데, 이것이 [[55년 체제]]의 시작이다.]의 창당자금으로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먹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도조 히데키]]와 달리 사형되지않고,[[기시 노부스케]]랑 함께 살아남았다. 일본을 점령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과거 [[일본제국]]의 핵심이었던 우익정치권과 군조직을 밀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냉전]]이 본격화되자 다시 [[반공]]으로 넘어가는 역주행 과정에서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풀려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에는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일명 G2)와 야쿠자 조직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유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서 폭력단으로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의 탄생과 1955년 거대 공룡정당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탄생에도 관여하면서 정치권의 흑막으로 영향력을 키웠고 하토야마 퇴임 후 총재선거에 도전한 [[기시 노부스케]]에게도 힘을 보태었다.[* 다만 이때 기시는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배하였다.] 이시바시가 뇌경색으로 2달만에 퇴진하고 정권을 잡은 기시는 숙원인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앞두고 거당적인 협력이 필요하게 되어 차기 정권을 당인파(党人派)[* 정당 정치인 출신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일본의 보수정당들은 1980년대까지도 청년시절부터 직접 정당에 참여해서 정치에 입문한 당인파와 고시에 합격해서 정부에서 일하다가 정치권으로 들어온 관료파 사이에 은근한 갈등이 있었다.] 실력자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에게 넘긴다는 서약을 하게되는데 이때도 코다마가 입회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더불어 함께 입회인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와 [[홋카이도]] 탄광기선의 사장 하기하라 기치타로였는데 세명 모두 [[고노 이치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케다 하야토|이 서약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이후 아이젠하워 방일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이 격화되자 우익과 [[야쿠자]]를 동원해 통해 맞서는 구상이 [[기시 노부스케]] 정권내에서 대두되었는데 당시 자민당 간사장 가와시마 쇼지로와 만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논의하고 공작에 나섰던게 코다마였다.[* 기시와 코다마는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프리즌에 함께 수감된적 있다.] 기시가 물러난 후 오노 반보쿠-[[고노 이치로]]로 이어지는 당인(党人)정권을 기대하였던 고다마는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에 취임하자 매우 실망하였고 관동지역의 주요 야쿠자들과 우익세력들을 움직여 이들 명의로 자민당을 상대로 파벌정치를 종식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자민당 입장에서 야쿠자들이 공공연하게 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개가 주인을 무는 격이었고 이에 자민당 측은 경고의 의미로 야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제1차 정상작전(第一次頂上作戦)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